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롤랑 바르트 (문단 편집) === 텍스트 === '권력에 의해 작업되는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언어'를 폭로하는 것이 바르트의 초기 사상이었다면, 후기 사상에서 바르트는 그 자체가 탈권력의 지표로 간주되는 '텍스트(Texte)'의 실천에 관심을 가진다.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작가는 자신이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다만 이전의 인용들을 모방하여 뒤섞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작가를 필사자(scripteur)라고 부른다.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ㆍ감정ㆍ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이나 문화 또한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따름이다. 이러한 텍스트는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자신을 변형시켜 나가는 유희이자 실천으로써 재생산된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서, 서로 다른 근원들이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하므로써 계속해서 덧붙여지거나 삭제되는 변화를 겪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에게 있다. 독자는 이렇게 씌어진 모든 흔적들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하나의 동일한 장 안에 모은다. 그러한 독자는 그 텍스트를 자신의 욕망에 따라 해석하고 변형시키는 육체의 즐거움을 가진다. 하지만 단일 근원의 권력으로서 '저자의 의도'가 글의 모든 의미를 고정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다양한 재해석의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독자의 즐거움을 뺏어가는 것일테다. 바르트는 그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텍스트'의 다중 근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독자의 글쓰기와 그 글쓰기에 대한 즐거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것도 바로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서 저자의 의도가 강요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글쓰기에 그 미래를 되돌려 주기 위해 글쓰기의 신화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망테이아 (1968)》에 수록된 「저자의 죽음」 중에서.. 더 나아가 바르트는 '언어 자체의 권력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권력은 '저자의 의도를 강요하는 해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언어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언어는 분류이며, 모든 분류는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언어의 권력성, 지배 견해의 폭력, 상투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언어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언어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 바르트에 따르면 언어의 권력으로부터의 전복적인 양상은 기존의 문화나 언어의 파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언어를 변형하고 재분배하는 데 있다. 언어의 재분배에는 반드시 틈새가 있게 마련이며, 이 틈새가 즐거움을 생산한다. 그러나 말그대로 언어를 파괴해버린다면 그러한 즐거움을 찾을 길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를 쳐부수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자 했던 [[초현실주의|초현실주의자]]의 시도는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위반이란 파괴가 아닌 인정하고 전도하는 것이다." (김희영 『텍스트ㆍ즐거움ㆍ권력ㆍ도덕성』 참조)] 따라서 "우리에게는 언어체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일, 언어체를 속이는 일만이 남아 있다." 바로 이것이 언어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바르트가 제시한 전략이다. 이 속임수를 그는 '글쓰기(écriture)'라 부른다. 언어 안에서 언어와 투쟁하는 작업을 보여주는 글쓰기, 한 언어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다른 언어를 억압하지 않으며, 미래의 주체가 '어떤 후회도 억압도 없이' '욕망의 수만큼이나 많은 언어를' 구사하며 즐기는 글쓰기, '법칙이 아닌 변태'에 의해 이런저런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글쓰기, 하나의 언어가 권력에 의해 수렴되면 곧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동 작업, 총체성의 괴물을 깨부수는 단편적인 글쓰기 또는 단상, 대립항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통합의 항이 아닌 그것과는 전혀 엉뚱한 제3의 항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대립항의 빗금을 들어올리는 '중성(neutre)'의 언어. 이러한 글쓰기는 철학적이기 보다는 문학적이며 소설적이다. 소설적인 것이란 바로 주인공도 플롯도 없는 불연속적인 언어의 나열, "단순한 비구조적인 절단, 형태의 분산, 즉 마야[* 산스크리트어로 '환영', '기만'이라는 뜻이다. 고대 베단타 종교는 '현실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연극과 같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환영'이라는 것이다.]이다." 이미지와 사유와 형태의 분산을 통해 삶의 불연속적이고 부단한 움직임을 무대화하고, 시니피에를 추방하고 시니피앙의 관능적인 유희에 몸을 내맡기고, 표면의 억압으로부터 매몰되어 갇혀 있는 저 육체의 언어를 복원시키고, 자아의 완전한 해체를 꾀하는 글쓰기, 바로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소설적 텍스트이다. 이런 '텍스트'를 통해서야 '언어 자체의 권력성'에서 벗어나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리하여 자유를 가진 '독자'가 비로소 탄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